이름 : bunnylee 조회 수 5077

"믿음이란 인식상의 오류가 아니라, 욕망의 오류이다." 라고 예전에 싸이에 끄적거린 적이 있었죠.

황빠들이 황구라의 사기를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었죠. 황구라가 사기를 쳤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대단한 과학적 지식이 필요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어요. 그들이 황구라를 끝까지 믿었던 이유는 황구라가 대한민국을 단번에 질병 없는 유토피아로 만들어 주길 바라는 욕망이었죠. 마찬가지로, 광우병 사태 때, 광우병이 사실은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 대단한 과학적 지식이 필요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어요. 광우병이 정말로 그렇게 무서웠다면, 한국도 안전 지대가 아니며 전수 검사를 해야 한다는 주장을 대중들이 그렇게 간단하게 생까지 않았겠죠. 광우병 공포의 기저에는 이명박 정권에 대한 반감이 깔려있었어요. 광우병은 좋은 핑계였죠.

 

저는 무신론자입니다. 예전에는 불가지론에 Practically, God doesn' t exist 라는 식의 약간 유보된 입장이었다면 (나에게는 신이라는 가설이 필요하지 않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였죠? 그거랑 비슷한 태도였죠)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읽고 그냥 "Practically"를 떼버렸어요. 어차피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모든 것이 진실이라는 보장은 없잖아요. 나중에 내가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면 그 때 바꾸면 되는데, 굳이 "신"의 문제라고 해서 조심스러울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그 책을 보면서 했어요. 도킨스가 종교 현상을 바라보는 1차원적 시각은 그다지 맘에 안들었지만, 적어도 신의 존재 유무를 결정하는 나이브한 태도는 좀 멋져보였어요.

 

큰 기대를 하지도 않고 투표를 하고 돌아왔는데, 출구조사에서 한명숙과 유시민이 의외로 선전을 하고, 좌희정, 우광재, 김두관이 1위를 달리니까,  자연히 노무현 대통령 생각이 났어요. 하늘에서 우릴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마음이 되어 버리더라고요. 무신론자인 제가 그런 망상을 하다니 말도 안돼죠. 그렇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노제와 봉하 마을에서 무지개가 보였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1주기 때 비가 적당히만 와서 노란 우비를 입고 행사를 하는 사진을 볼 때도 노무현 대통령은 그냥 아무것도 아닌 無의 상태가 아니고 뭔가 초현실적인 영향력을 가진 것이 아닐까 하는 망상으로 희망을 느끼고, 심지어 세상이 너무 말도 안되게 돌아가서 화가 날 때도, 노무현 대통령이 죽음이 이렇게 헛될 리는 없다고 믿으면서 위로를 받아요. 우리나라가 이대로 부조리의 사회로 계속 남을 거라는 서사는 저에게는 불가능한 서사예요. 저에게 세상은 그렇게 예정되어 있지 않은 거죠.

 

오늘 좌희정, 우광재, 김두관이 결국 당선되고, 한명숙, 유시민이 낙선하자, 한명숙, 유시민을 대선에서 쓰기 위해서는 오히려 잘된 일일 수도 있다는 식의 생각마저 들었어요. 그러면서 저 "믿음이란 인식상의 오류가 아니라, 욕망의 오류이다." 라는 문장이 생각난 거죠. 신도 영혼도 존재하지 않아요. 압니다. 그런데 자꾸 그렇게 믿고 싶네요. 이런게 인간의 "종교 본능"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어요. 도킨스가 아무리 논리적으로 유신론을 논박해도, 사람들은 믿고 싶어서 믿는 거죠.

 

쓰다 보니, 별로 건전하지 못한 선거 후기가 됐네요. 음악이나 같이 들어요.

 

David Bowie - Life On Mars?

http://www.youtube.com/watch?v=v--IqqusnNQ

 

 


soboo

06.04 00:08

믿음, 욕망은 종교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봐요. 말씀하신대로 그런 것들이 종교본능이긴 하지마는....
하도 말도 안되는 일이 계속 벌어지고 권력은 요지부동이고 사람들이 나 몰라라하는 것처럼 보이니 그런 초현실적인 힘에 의존하고 싶어지는것이 바로 종교를 낮게 되는 거 같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세상을 바꾸어 나가는 것은 "깨어 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 = 투표"네요 ^^

Koudelka

06.04 00:09

'우리나라가 이대로 부조리의 사회로 계속 남을 거라는 서사는 저에게는 있을 수 없는 서사예요. 저에게 세상은 그렇게 예정되어 있지 않은 거죠.'-찡하고 짠하네요.

폴라포

06.04 00:10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아다지오
저도 굉장히 좋아해요

being

06.04 00:26

종교성, 영성은 인간의 본능이죠. 이것이 조직화된 '종교'를 '가지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지만, 기본적인 인간 본능은 무시할 수 없지요.

그리고 신도 영혼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그렇게 단언할 수 있나요. 제가 이해할 수 있는건 기독교나 이슬람교 등에서 이야기하는 일신교의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논리적으로 이야기 할 수 있다 정도까지일 뿐. 이것이 종교성이 소멸되어야 할 필요충분조건은 전혀 아니죠.

Jobim

06.04 00:29

멋진 글인데요. ^^
저 조금 눈물이 나네요. 글 잘쓰십니다. 인간은 희망의 동물인가 봅니다. 저도 한명숙 유시민의 낙선을 보며 대선을 쓰기 위해서는 오히려 잘되었다라는 생각까지 했으니 말입니다.

아비게일

06.04 02:05

잘 읽었어요. 정말.

SykesWylde

06.04 05:32

그리스신화는 종교였지요.한때는...기독교도 조만간...
안희정 딴지인터뷰 이어지겠지요? 이광재와 김두관도..한번...

27hrs

06.04 07:22

믿음은 욕망의 오류라는 말에 동의합니다. 그보다는 욕망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더 살기 좋아지는 내 나라라는 것을 믿고 싶어지네요. 전 정말 이민가고 싶지 않거든요! 갈 능력도 없고.

가끔영화

06.04 07:48

사람은 어차피 살아야하는 본능 때문에 타협의 대상을 신으로 정할 수 밖에 없을걸요
결국 신과 사람은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도 해봐요.

박버섯

06.04 08:29

근데 거기가 봉화마을이예요?
봉하마을은 또 어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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